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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ongHyun
Subject   2015 김동현 전시평론글-이선영
구르는, 또는 굴려지는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동현은 11월 말 열린 2015 창조경제박람회(2015 Maker Festival, 코엑스 홀)에서 2014년에 시작한 핀볼 머신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토 타입의 기계를 선보였다. 관객이 바탕에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핀 볼 머신에서 볼을 쏘아 올려 양 손으로 측면의 레버들을 탁탁 치면서 종을 맞추면 롤링 볼 머신이 작동하여 중력에 의해 볼이 가장 아래로 내려오면 초콜릿이 나오는 시스템이다. 그것을 작동해보기 위해 줄지어 선 모습은 통상적인 미술 전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러한 ‘즐거움과 유희’는 김동현의 키네틱 설치작품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한 관객 참여에 대한 기대가 미술작가로서는 버거울 수밖에 없는 과학 기술의 영역에 손을 뻗치게 했을 것이다.

적극적 참여든 수동적 소비든, 대중의 상호작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분야는 과학기술이다. 관객참여에 대한 기대치를 가진 예술이 과학기술 분야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김동현의 작품은 단순히 대중성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관객은 수동적 구경꾼이 아니라, 작품의 한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관객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연쇄반응의 한 요소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관객의 참여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특히 그러한 참여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일 경우에 그렇다. 새로운 표현을 위해 작가는 낯선 영역을 끝없이 개척해야 한다. 김동현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기에 익숙해질 틈도 없고, 익숙해질 만하면 이미 자신의 마음은 떠나있는, 합리주의와는 무관한 작업 스타일을 고수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 자체는 합리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성이 광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듯이’(미셀 푸코) 합리주의를 추동하는 것은 비합리주의이다. 그리고 비합리주의는 합리적인 수단으로 관철되곤 한다. 처음에는 무작정 시작했지만, 이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수많은 협업을 진행해왔고, 그래서 작가로서 과학기술자와 과학자들이 모여 있는 박람회에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상상하고 과학자는 증명한다’지만, 김동현은 자기 안에 두 과정을 합치고 싶어 한다. 다른 분야와의 협업도 작가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야 가능하다. 양자의 접속부위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는 겉돌고 서로를 도구화시키는 선에서 끝난다. 관찰과 실험이라는 근대과학의 방식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에도 공통적 유산이 되긴 하였지만, 일단 두 분야의 언어가 크게 다르다. 물론 언어란 상호 번역될 수 있지만, 일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예술에서 발견되듯 언어란 극히 불투명하다. 새로움과 진보라는 현대의 보편적 가치 역시 각각 다른 기준으로 평가 및 의미화 된다. 굉장한 명분을 가지는 그 수많은 예술+과학의 협업이 양쪽에서 투입한 에너지에 비해 빈약한 성과를 내는 이유다. 대개 양자의 만남은 피상적이고 장황한 장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새로움은 경계 사이에서 만들어지기에 도전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은 철저한 분업에 의해 추동되어 왔고, 그것이 막강한 생산력의 진보를 가져와서 이후 인간 활동의 가장 강력한 모델이 되어왔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정작 예술은 빈약해 졌다. 오늘날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부류의 예술가/과학자를 기대하긴 힘들다. 미술은 미술계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장식 아니면 계몽으로 버티고 있을 따름이다. 장인에 머무르는 장식은 기생적이고, 보편적 지식인에 머무르는 계몽은 비효과적이다. 예술가가 감당하기에 하나는 너무 지엽적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과도하다. 예술은 하나의 영역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영역을 담당한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속성은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예술 쪽에 속하게 했다. 이때 예술은 과학이든 종교든 신화든 무엇이든 끌어올 수 있다. 그 결과물은 분과 과학도 (분과)예술에도 속하지 않는다. 추상적 공간에 속하지 못함, 속할 수 없음은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현실화하려는 집요한 움직임을 낳는다.

현실에서 현실, 관념에서 관념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출발 했던 지점과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이 중요하다. 정체성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이러한 경계 위의 게임만이 동일성의 재현이 아닌 이질성의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도달지점이 예측 불가능한 무모함은 작가의 약점이 아니라, 장점일 수 있다. 예술은 모든 무모함에 바쳐진 이름이다. 과학의 경우에는 너무 많은 인력과 조직, 자본이 요구되기에 모험이 힘들다. 그러나 일단 어떤 임계점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 과학자체가 세계 공통 언어로 구동되는 강력한 연결망의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김동현은 내년에 이를 4배로 확대하여 전체 공간을 작은 쇠구슬이 주파하는 연쇄반응 장치를 만들 예정이다. 올해 시험적으로 선보인 프로토 타입의 기계는 정교한 장난감 같은 모습에 머물렀지만, 그것이 관객이 속한 전체 공간을 가득 채울 때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비유하는 예술 기계로 보여 질 것이다. 중력에 의해 움직여질 작은 구슬은 우주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힘(중력)을 발견한 뉴턴처럼, 딱딱 맞아 돌아가는 시계 같은 우주를 그려낼 것이다.

그것은 경이로운 기계로서의 우주지만, 누가 기계를 만들고 왜 그렇게 작동시켰는가의 문제는 열려있다. 우주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물리학자인 뉴턴이 말년에 연금술과 신학, 고대 역사에 심취한 기이한 면모를 보인 것은 그가 세계의 이면도 볼 수 있는 진정한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동현의 작품에서 주어진 계 안에서 미친 듯이 튀는 핀 볼의 배경은 고래 내장의 모습이다. 내장 안의 물고기들은 우주 안에 또 다른 우주가 겹겹이 내재해 있는 우주를 상징한다. 작가에 의하면, 우리의 세계는 고래의 내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가 모든 것이 하찮고 허무하다는 사고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사고는 아무리 미소한 것도 자기 역할이 있음을 말한다. 다만 이전시대와 같은 계층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각되는 수평적 관계는 해체로 보일수도 있지만, 그 역시 또 다른 관계임은 분명하다.

인간 또한 이 연쇄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사고를 낳기도 했지만,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고를 전복시켜 간 것은 과학적 사유이다. 전통적으로 전체에 대한 사로를 담당해 왔던 것은 신화나 종교였지만, 근대 이후 종교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은 예술이었다. 가장 경쟁력이 있던 과학도 적절한 서사로 번역될 경우에만 그러한 비전을 담을 수 있다. 오늘날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과학 담론은 과학 사상가들의 필력에 의해 전달된다. 그러한 서사는 지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문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타 분야의 사람들이 과학을 접하는 경로가 그렇다. 김동현 역시 이러한 작품을 하기 전에 생물학이나 물리학 같은 분야에 대한 독서를 꾸준히 해왔다. 그것이 미학이나 미술사를 학습하는 것 못지않게 예술에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술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독서와 실행의 인과관계가 있다.
작품의 낱낱이 어떤 이론의 번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식에 대한 느낌을 상징화하는 것이다. 핀 볼 머신을 활용한 작품에서 우주 전체는 하나의 망으로 간주되었고, 누군가 에너지를 불어넣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볼이 과녁을 맞추면 연쇄작용에 의해 결과물이 주어진다. 지금은 동전모양의 초콜릿이지만, 운동의 촉발자에게 주어지는 작은 선물의 내용물은 다른 무엇으로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이 찍혀 있다 보니 마지막 과정이 다소간 밋밋한 것이 흠이다. 그러나 작품의 규모가 커지면 좀 더 다양한 결과물과 그 결과에 따른 또 다른 피드백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동그란 구의 움직임과 둥근 초콜릿은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핀 볼과 롤링 볼 머신 옆에 관객들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딱지 형태의 컵받침도 둥글다. 하기야 돈도 둥글지 않은가. 둥근 형태는 처음과 끝보다는 무한한 과정을 강조한다. 공처럼 막힘없이 계속 굴러가게 하는 것이 이 체계의 목표다.

유사한 형태는 유비적 사고를 이끌며, 그 역도 성립된다. 현대미술 작가는 누구를 향해 발신하는지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끝없이 만들곤 한다. 작업에 대한 무모한 사랑으로 투입된 그 무한 에너지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는 있을 것인데 그곳이 어디인가. 상품이나 노동처럼 단위당 명확한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것도 아닌 작품과 예술이 운명처럼 지고 가는 이 질문은 상징적 차원으로나마 도해될 필요가 있다. 김동현이 활용하는 핀 볼 머신은 작가가 고안한 물리적 장에서 에너지가 흘러가는 궤적을 보여준다. 그 궤적을 좀 더 길게 늘리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궤적이 길어질수록 의외의 요소가 개입될 수 있고, 우연은 정교한 장치로 구현된 필연과 상호작용하여 또 다른 변화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관객의 반응은 작가에게 피드백이 되어 다음 작업을 추동하는 에너지원이 된다.

김동현의 예술 기계는 중력, 운동, 마찰 같은 물리적 법칙을 활용한다. 특히 축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원형운동이 편재한다. 기묘하게도 이 원형운동은 하트를 닮은 도형을 만들기도 해서 우주에 충전된 에너지나 기(氣)같은 실재를 생각게 한다. 원형운동을 이용한 다양한 물리적 장치들은 순환을 만든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한 반복적 순환이 아닌, 형태는 같지만 움직이며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는 인간과 자연 전체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그 기본 메카니즘은 ‘Cardioid System’에 바탕 한다. 원형은 끝없는 연결망을 상징하는 도형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주제는 그림으로부터 시작된 초창기 작업부터의 주제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있는 작업과정으로 변모한 후 몰입도는 더욱 커졌다. 미술가에게 익숙하지 않은 과학적 기술적 방법은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지식과 정보가 형식이 되는 과정이 작가에게 전에 없던 몰입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매 단계마다 절망과 기쁨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부분적인 것에 매몰되고 소진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오류를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나오는 산물이 있었다. 도전은 결과로만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서는 부차적인 것이 주역으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 역전은 너무 극적이어서 미술에서는 주변적인 것만이 남아있는 것 같을 정도다. 그러나 끈 떨어진 주변성은 말 그대로 주변에 머문다. 현재 미술계를 지배하는 것은 처음부터 포기된 도전정신이다. 그것이 그 나마의 위치를 보존하려는 현실적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김동현처럼 우주적 차원까지 생각하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는 작가는 괴짜 취급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도면밀한 현실주의자보다는 다소간 어이없어 보이는 괴짜를 좋아하며 응원한다. 그래서 작가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작업경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것과 큰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거시적인 문제의식 역시 작가에게는 현실적 문제일 수 있다.

주변이 주변인 것은 중심과의 관계 때문이다. 비록 이 중심은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하며 끝없이 주변에 영향을 준다. 물론 주변이 중심에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에게는 계획하지 않고 그리는 그림처럼, 자연계의 리듬에 편승해서 그냥 가는 갈 때의 희열이 있었을 것이다. 자연 법칙을 실제 작품에 구현하려했을 때의 오차나 실수도 흥미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과학의 역사에는 그러한 예가 종종 등장한다. 오류도 체계의 요소이며, 모든 열린 체계는 오류를 또 다른 인자로 수용한다. 독재체제만이 의외의 것은 바깥으로 영구 추방하려며, 자신의 동일성을 고수한다. 국가 뿐 아니라 자아도 그러한 독재체제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 자아의 경우라면 편집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도 예술도 아닌 영역에 자리를 잡은 김동현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토포이 박사’에 투사한다. 오토포이 박사는 제로라는 유일한 부하를 거느리고서 언제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모를 연구에 밤낮 없이 몰두한다.

작가에 의하면, ‘Autopoesis’라는 말에서 비롯된 오토포이 박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조합해서 가상의 생명체를 만드는’ 과학자다. 그의 자기소개서에 따르면 ‘나의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을 물리적,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며, ‘하나의 힘(input)이 다양한 장치들과 연결되어 여러 힘과 움직임으로 변환(output)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역동적인 힘은 작가에게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도 직접 체험되어야 한다. 분과 과학의 시대에 어느 누구도 통달할 수 없는 다양한 원천을 희한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오토포이 박사는 괴짜, 엉터리, 사기꾼, 몽상가, 이상주의자 등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부분 부분은 합리적이지만, 전체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산물은 오토포이 박사의 작업을 예술과 중첩시킨다. 그것은 비합리주의와 구별할 수 없는 합리주의 이후의 합리주의다. 변화는 체계의 경계, 또는 그 밖에서 추동되며, 체계는 이러한 변화를 증폭시킨다. 변화란 어떤 부문에서 일어나든지 예술적이다.

예술은 변화 그 자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취해왔다. 변화의 증폭이 가능한 것은 항목들이 모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계적 사고는 과학기술과 세계시장화를 통해 자연적, 문화적 생태계가 변모하면서 부각되기 시작해 ‘지구시대’(애드가 모랭)라는 용어도 만들게 했다. 사회학자 애드가 모랭은 [지구는 우리의 조국]에서 21세기의 ‘다시 잇는(re-lier)’ 사고를 제3의 종교라고 부각시킨다. 그것의 역할은 심연과 미지를 향해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합리성을 완전하게 이용하며, 그 기능은 단순이 이어주는 것이다. 저자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사물은 원인을 제공받는 동시에 원인을 제공하고 도움을 받는 동시에 도움을 주고, 간접적인 동시에 직접적이므로 또한 모든 사물은 가장 멀리 떨어진 것과 가장 다른 것까지도 연결시키는 자연적인 관련성에 의하여 유지되므로, 나는 전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부분들을 알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부분들을 알지 못하고서는 전체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시 잇기’ 작업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것을 확실한 토대 위에 체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대화하는 것이다. 고대 이래 자연 자체는 운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자연을 이루는 요소들 사이에 벽을 세운 것은 근대 문명이다. 자연은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과정’(화이트헤드)이다. 사물의 구체적 움직임에 기반 하는 김동현의 작품은 과정을 실체화 한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우주의 과정을 확장성과 목표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확장성은 우주의 과정이 공간과 시간의 무대 위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공간에 퍼져있고 시간에 따라 진행한다. 키네틱 아트에서 시간성은 중요한 요소다. 시간은 일련의 인과관계를 만든다. 둥글둥글한 궤적으로 가득한 김동현의 작품에서 인과관계가 직선적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녀의 작품 기반을 이루는 생각, 즉 모든 것이 이어져있다는 사고는 현대에 다시 발견된 ‘오래된 미래’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종교적 사고의 바탕이었고, 특히 18세기의 ‘존재의 대연쇄’라는 사상에서 두드러졌다.
아서 러브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자연이라는 단어 다음으로 존재의 대 연쇄는 18세기의 성스러운 말이었으며, 19세기 후기에 진화라는 축복받은 단어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낙관주의적 세계관이다. 러브조이에 의하면 18세기 낙관주의자들의 공동 논제는 현세가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것이라는 명제다. 즉 ‘무엇이든 사물이 결코 다른 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일단 우리가 알고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견딜만한 것으로 바뀐다’(스피노자)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헤겔의 논리학이 말하듯이, 필연은 자유일 수 있다. ‘신의 주사위 놀이’(아인슈타인)--고정된 인과관계보다 확률을 중시하는 현대물리학에서 그 주사위는 원자구조처럼 둥글게 생겼다고 말해진다--처럼 유희적 요소가 있는 김동현의 작품 외관은 밝고 경쾌하다. 기이한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는 그림도 그렇지만, 설치작업에 이미지가 섞여드는 경우 매우 화려하다.

작품에는 그런 것을 만들기 위해 오토포이 박사가 흘렸을 법한 땀과 눈물은 나타나 있지 않다. 오토포이 박사는 블랙 유모어를 구사할 때조차도 음울함과 폐쇄성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현대의 미술작가가 가지고 있는 많은 어려움은 절망과 우울로 점철된 작업을 양산하는 주된 이유이다. 일반 사회와 거리를 둔, 유폐된 조건 아래의 그들에게 바깥바람 이래 봤자 방관자 및 방랑자 입장에서 돌아다니는 여행자의 태도가 전부다. 그런 점에서 같은 조건을 가진 전업 작가 김동현이 매번 다른 도전을 요구하는 골똘하게 연구하는 작업 스타일 외에, 검도와 서핑을 즐기는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러한 특이함이 자신의 긍정적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다양한 연원을 가지는 에너지들의 유일한 수용체 및 증폭체, 변환체가 아닐까. 에너지의 구체적 전달 방식은 작품 속에 편재하는 ‘Cardioid System’에 근거한 원형운동이다.

그것은 원이나 구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상징적 사고와 연계된다. 아서 러브 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 대한 이미지를 원이나 구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명백한, 이해하기 쉬운 단일한 구조를 가졌다. 원이나 구는 명확한 형태일 뿐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단순하고 완벽한 형태라고 생각되는 구조이다. 그것은 우주와 정신의 모델이 되면서, 동시에 자아의 모델이기도 하다. 동양의 만다라에는 그러한 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이 연계된다는 신비한 사고는 유비적 사고의 특징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유비적 사고는 정신의 세계를 별들의 세계로, 그리고 별들의 세계를 월하의 세계로 연결하는 불가사의한 연쇄작용을 본다고 지적한다. 즉 위에 있는 것은 아래의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그 역도 가능하다. 이렇게 우주는 모든 것이 다른 것들을 의미하고 다른 것들에 반사되는 엄청난 유리의 방으로 인식된다.
연쇄는 무한하게 지속되며 해석은 무한해지는 상호작용의 미로이다. [해석의 한계]에 의하면, ‘유사함은 결코 안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으며 또 다른 유사함을 가리킬 때만 정착된다...유추가 증명되고 확실시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를 주파해야만 한다’(미셀 푸코) 이를 통해 신비롭고 무한한 표류의 무대가 펼쳐진다. 에코는 표류의 대표적인 특징은 시니피에에서 시니피에로, 유사성에서 유사성으로 연결고리에서 또 다른 연결고리로 미끄러지는, 제어될 수 없는 온갖 수단과 방법이다. 궁극적인 시니피에는 접근 불가능한 비밀일 수밖에 없다. 지상에서의 안정된 삶을 위해 확실한 것에만 안주하는 기능적 사고에서 이러한 끝없는 진리의 세계는 부조리해 보일 뿐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생각할 때의 무리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뻔하게 보는 이는 예술도, 인간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조차도 그렇게 보며, 단순한 재생산자에 머문다.

그들이 재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존 제도와 권력의 재현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원형을 복제하고 전파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한다. 하기야 재현도 생성을 위한 바탕 면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존재 의미가 있다. 관계망을 더욱 넓혀가며 돌고 도는 세계를 표현하는 김동현의 작품은 동일한 지점으로 되돌아올 뿐인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차이는 관념이 아닌 실행에서 발생한다. 계획과 실행, 말과 사물은 차이가 있다. 대부분은 계획이나 말, 또는 실행이나 사물 그 자체 만족한다. 그래서 세상은 만들지는 않고 떠들기만 하는 부류와 생각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부류로 나뉘어 있고, 이러한 부정적 이항대립과 타협이 지배한다. 그래서 현상은 유지되고 변화는 그렇게도 더디게 일어날 뿐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체계에서 변화는 사건으로 간주되며, 사건만이 변화를 야기한다. 차이가 있는 두 항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무엇인가 생성된다. 손으로 사고하는 이만이 그 중요한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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